Vol.265
July
ENG
SPECIAL 2

AI, ICT 대전환의
주역이 되기까지

1980년대 후반, 국내에서 ‘인공지능(AI)’이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 ETRI는 이미 언어와 음성, 영상 데이터를 컴퓨터가 이해하도록 만드는 연구를 시작하고 있었다. 초기의 인공지능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번역하고 음성을 인식하는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스스로 문맥을 학습하고 의미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진화했다.

낯설었던 AI의 등장

1987년,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 정부가 AI를 차세대 핵심기술로 공식 육성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국내에서도 인공지능 연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AI는 대중에게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지만, ETRI는 정부 정책에 발맞춰 언어처리와 음성인식 분야를 중심으로 관련 기술개발에 착수했다.

1988년 ETRI는 ‘영·한 및 한·영 기계번역 시스템 개발’ 과제에 참여하며 자동번역 연구를 본격화했다. 당시 목표는 과학기술 논문을 대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번역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후 연구는 단순 번역을 넘어 실제 의사소통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로 확대됐다. 1993년부터는 자동통역 기술 연구가 시작됐고, 1995년에는 한·일 자동통역 시스템 기술이 공개됐다. 이 시스템은 음성인식, 기계번역, 음성합성 기술을 결합해 사람의 말을 실시간으로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구조였다.

1996년에는 미국 카네기멜런대학교, 일본 ATR, 독일 지멘스 등과 함께 국제 공동연구 컨소시엄 ‘C-STARⅡ’를 구성했다. 이를 통해 ETRI는 음성인식·언어번역·음성합성 기술을 통합한 대화체 음성언어 번역시스템을 개발했고, 1999년에는 미국·일본·프랑스와 함께 국제 자동통역 시연에 성공했다. 이는 국내 AI 기술이 세계 공동연구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입한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한·일·영·불어 자동통역 시연회’ 기사(매일경제, 1999.07.22.)

번역을 넘어, 실제 서비스로 연결되다

2000년대 들어 ETRI의 인공지능 연구는 실용성과 상용화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대됐다. 자동번역 기술은 방송, 특허, 기업문서 등 실제 산업 환경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2002년 ETRI는 ‘실시간 한·중 방송 자막 자동번역 시스템’을 개발했다. 한국어 방송 화면에 중국어 자막을 실시간으로 생성하는 기술로, 생방송과 녹화 영상 모두에 적용할 수 있었다. 이는 국내 자동번역 기술이 단순 문서 번역을 넘어 영상 콘텐츠 분야로 확장된 사례였다.

2003년부터는 특허 문서 자동번역 기술 개발이 추진됐다. 연구진은 긴 문장이 많은 특허 문서를 실시간으로 번역할 수 있는 한·영 특허문서 자동번역 기술을 개발했고, 해당 기술은 2005년 상용 서비스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보다 약 3년 늦게 시작됐지만, 번역 품질은 유사한 수준까지 도달한 것으로 평가됐다.

기업 환경의 글로벌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기업문서 자동번역 연구도 확대됐다. ETRI는 기술문서·보고서·매뉴얼 등을 대상으로 한·중·영 자동번역 기술을 개발했고, 규칙 기반·통계 기반·패턴 기반 방식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구조를 적용해 번역 품질을 높였다.

같은 시기 음성 인터페이스 기술도 발전했다. 2007년에는 최대 45만 단어를 인식할 수 있는 음성인식 내비게이션 SW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고, 2009년에는 음성으로 영화 제목과 장르를 검색할 수 있는 IPTV 시스템을 선보였다. 이는 이후 AI 스피커와 음성 비서 기술로 이어지는 기반이 됐다.

‘한·중·영 기업문서 자동번역 기술’ 개념도

딥러닝 시대, 스스로 학습하는 AI의 출현

2010년대 중반 이후 AI 기술은 딥러닝을 중심으로 급격히 진화하기 시작했다. ETRI 역시 기존 규칙 기반 기술에서 신경망 기반 기술로 연구 방향을 빠르게 전환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경망 자동번역 기술이다. 글로벌 ICT 기업들이 2016년부터 신경망 자동번역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자, ETRI도 같은 해 관련 연구를 시작했다. 기존 통계 기반 번역보다 문맥 이해 능력이 뛰어난 신경망 구조를 적용하면서 자동번역 품질은 크게 향상됐다.

이 기술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세계 최초의 ‘올림픽 공식 자동통역 서비스’로 구현됐다. 연구원은 한글과컴퓨터와 함께 8개 국어 자동통역 서비스를 구축했고, ‘Zero UI 동시통역’ 개념도 세계 최초로 제안했다. 사용자가 화면을 조작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화하듯 통역이 가능한 방식이었다.

심층질의응답 기술 ‘엑소브레인’ 역시 ETRI AI 연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2013년부터 시작된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 ETRI는 언어를 이해하고 문서 속 의미를 분석해 답변하는 AI 기술을 개발했다. 단순 검색이 아니라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고 문맥을 분석하는 기술이었다. 엑소브레인은 2016년 EBS 장학퀴즈에 출전해 왕중왕전 우승자와 수능 만점자들을 상대로 우승하며 주목받았다. 이후 ETRI는 한국어 특성을 반영한 언어모델 ‘코버트(KorBERT)’를 공개했고, 한국어 기계독해 분야에서 우수한 성능을 기록했다. 이는 국내 AI가 한국어 기반 언어지능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엑소브레인 EBS 장학퀴즈 우승(2016.11.)

보는 AI와 말하는 AI, 현실 속으로 확장되다

ETRI의 인공지능 연구는 언어를 넘어 시각과 교육, 사회안전 분야로도 확장됐다. 대표적인 기술이 시각지능 플랫폼 ‘딥뷰(DeepView)’다. ETRI는 2014년부터 딥뷰 플랫폼 개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전통적 영상인식 기술과 딥러닝 기반 기술 연구를 병행했지만, GPU 성능 향상과 함께 딥러닝 중심 기술개발로 빠르게 전환했다. 이후 사물 인식뿐 아니라 행동 이해 기술까지 연구 범위를 넓혀갔다.

연구진은 1,500종의 사물을 분류하는 ‘ObjectNet’과 사람의 행동 의미를 분석하는 ‘ActionNet’을 개발했다. 특히 사람의 자세와 객체 간 상호작용을 분석해 행동을 이해하는 기술은 사회안전 분야 실증으로 이어졌다. 서울 은평구와 세종시 등에서는 쓰레기 무단투기 자동탐지 기술 실증연구가 진행되기도 했다.

딥뷰 기술은 2017년 세계 최고 권위의 영상인식대회인 이미지넷 챌린지 대회(ILSVRC)에서 사물 검출 성능 기준 세계 2위를 기록했다. 이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도 선정되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쓰레기 무단투기 단속 실증 연구(서울시 은평구청, 세종시)

한편 ETRI는 음성 인터페이스 기술을 교육 분야에도 적용했다. 2010년부터 개발된 ‘지니튜터(GenieTutor)’는 학습자의 영어 발음을 분석하고 문법·표현 오류를 교정해 주는 대화형 영어교육 시스템이었다. 이후 관련 기술은 EBS, 네이버, LGU+, 엔씨소프트 등 다양한 기업 서비스로 확산됐고, 교육부 AI 영어 말하기 시스템과 세종학당 한국어 교육 서비스에도 적용됐다.

현재 ETRI의 AI 연구는 언어·음성·영상을 넘어 반도체·네트워크 등 전 분야를 연결하며 진화하고 있다. 초기의 규칙 기반 번역 기술에서 시작된 연구는 이제 스스로 문맥을 이해하고 행동을 분석하며 사람과 자연스럽게 상호작용을 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오늘날 대한민국 AI 기술 생태계의 중요한 기반 가운데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