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264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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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2

대한민국 SW의
기준을 만들다

인공지능(AI)이 산업과 일상을 바꾸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소프트웨어(SW)가 존재한다. 운영체제는 기계를 움직이고, 플랫폼은 서비스를 연결하며, 미들웨어는 다양한 시스템을 연결하고 연동한다. ETRI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SW 기술의 기반을 구축해 왔다. 국내의 유닉스·리눅스 서버용 운영체제, 매니코어 운영체제, 임베디드 운영체제, SCS SW, CPS 기술, SW 플랫폼 등 ETRI는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대한민국 SW산업의 자립과 진화를 이끌어왔다.

세계 최초의 운영체제에 도전하다

1987년, ETRI는 행정전산망용 주전산기 ‘타이컴(TICOM)’ 개발과 함께 본격적인 SW 운영체제 연구에 착수했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조차 단일 처리기용 운영체제 기술에 머물러 있었지만, ETRI는 다중 처리기용 운영체제 개발이라는 더 어려운 길에 도전했다.

연구진은 타이컴 시리즈 개발 과정에서 마이크로커널 구조를 기반으로 한 병렬 운영체제를 세계 최초로 개발함과 동시에 유닉스(Unix)의 확장성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구조와 기능들을 개발했다. 이 기능들은 현재까지 리눅스(Linux) 운영체제에도 폭넓게 활용될 정도로 의미 있는 성과였다.

2000년대 초반 리눅스 열풍이 국내에도 확산되자 ETRI는 공개 SW 표준 플랫폼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부요(Booyo) 리눅스’이다. 부요 1.0의 데스크톱 표준판은 빠른 부팅, 친숙한 사용자 환경, 인터넷뱅킹 지원 등 실제 사용성을 고려한 편리성 기능이 강조됐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부요 리눅스는 이후 국내 공개 SW의 표준 환경 구축을 목표로 3.0버전까지 개발되었다.

부요 리눅스의 가장 큰 성과는 국내표준의 리눅스 기반 데스크톱과 서버 플랫폼을 상용화해 관련 산업을 일으킨 것이다. 대전시청과 국방부 등 여러 공공기관에 실제 보급되었고, 국내 기업들이 자체 리눅스 배포판을 상용화해 7억여 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또한 국제 공개 SW 규격과의 호환성을 확보하며, 국내 공개 SW 플랫폼 확산의 기반을 마련했다.

(왼쪽) 행정전산망용 주전산기 ‘타이컴(TICOM)’
(오른쪽) 부요(Booyo) 리눅스 로고

임베디드 운영체제의 등장

ETRI는 임베디드라는 용어조차 낯설던 1990년대 말부터 관련 기술 개발을 시작했다. 임베디드 SW는 TV, 자동차, 로봇, 가전제품처럼 다양한 디지털 제품에 내장되어 하드웨어(HW)의 제어, 음성·데이터통신, 멀티미디어, 게임, 인터넷 접속, 유비쿼터스 컴퓨팅 등 기본 및 부가기능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다. 당시 국내 시장은 대부분 외산 운영체제에 의존하고 있었고, 다양한 산업 환경에 맞춘 독자 기술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1998년 ETRI는 실시간 운영체제 ‘큐플러스(Qplus)-T’를 개발하며 본격적인 임베디드 운영체제 시대를 열었다. 이어 ‘큐플러스-P’, ‘큐플러스 운영체제 플랫폼’, ‘큐플러스/Esto’ 등을 연속적으로 개발하며 운영체제뿐 아니라 개발도구까지 국산화에 성공했다. 특히 시스템 개발도구인 큐플러스/Esto는 해외 기술 의존도가 높았던 임베디드 개발 환경을 국내 기술로 대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ETRI의 임베디드 SW 기술은 이후 IoT와 스마트기기 시대를 맞아 더 진화했다. 경량 운영체제 ‘나노-큐플러스’는 저전력·고신뢰 무선통신 기술을 결합한 IoT 통합개발솔루션으로 발전했으며, 나노-큐플러스를 토대로 국제표준을 준수하는 라우팅 프로토콜 기술을 확보했다. 해당 기술은 서울 지하철 가스 모니터링 시스템과 노인 위치 인식 시스템 등에 적용되었고, 이후 국내외 사업에 활용됐다.

나노-큐플러스 기반 기술을 이전받은 국내 기업은 1,210억 원 규모의 원격검침 사업을 수주하며 해외 시장 진출에 성공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노르웨이 ‘SORIA 프로젝트’다. 이는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ETRI의 임베디드 운영체제가 실제 산업과 글로벌 시장으로 연결된 사례로 평가된다.

(왼쪽) 나노-큐플러스 로고
(오른쪽) 노르웨이 무선 원격검침기 현장모사 설치 사진

안전을 위한 SW, 하늘과 국방으로 확장되다

2010년대 들어 ETRI는 임베디드 SW 기술의 방향을 ‘안전성’으로 확장했다. 스마트 기기 시장은 민간 기업들이 주도하게 되었고, ETRI는 국방·항공·자동차처럼 높은 신뢰성과 안정성이 요구되는 ‘Safety Critical System(SCS)’ 분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무인항공기용 실시간 운영체제 ‘큐플러스-에어(Qplus-AIR)’였다. ETRI는 항공 기술 관련 국제표준인 ARINC-653을 준수하는 국산 운영체제를 개발했고, 미국 항공 SW 안전인증 최고 수준인 ‘DO-178B Level A’를 획득했다. 이는 국내 기술로 항공 운영체제의 안전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사례였다.

이어 ETRI는 하나의 하드웨어에서 두 개 이상의 운영체제를 동시에 안전하게 구동할 수 있는 ‘큐플러스-하이퍼’를 개발했다. 이를 통해 자동차, 드론, 선박처럼 다수의 운영체제를 손쉽게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해 경량화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것은 물론, 고장 시 신속하게 수리하여 위험을 막을 수 있게 됐다.

이 기술은 이후 ‘어스(EARTH; ETRI Advanced Real-Time Hypervisor)’로 발전하며 드론 시스템에 적용됐다. 기존 드론은 비행 제어와 임무 수행 기능을 각각 다른 하드웨어에 나누어 탑재했지만, 어스는 하나의 HW에 두 기능(SW)을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구현했다. 이를 통해 무게와 전력 소모를 줄이면서도 높은 안전성을 확보했고, 이후 UAM(Urban Air Mobility, 도심항공모빌리티) 분야까지 적용 가능성이 확대됐다.

어스(EARTH)가 탑재된 드론

현실과 디지털을 연결한 SW의 진화

ETRI의 SW 기술은 운영체제 개발에만 머물지 않았다. 2010년 이후에는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를 연결하는 CPS(Cyber-Physical Systems, 사이버 물리시스템) 기술 개발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CPS는 물리 시스템과 컴퓨터 시스템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실시간으로 제어·분석하는 기술로, 오늘날 디지털트윈의 핵심 기반이 된다.

당시만 해도 CPS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지만, ETRI 연구진은 스마트팩토리와 미래 산업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연구진은 실세계 모델링, 하이브리드 시뮬레이션, 동신 미들웨어 기술, 자율제어 기술 등을 개발하며 CPS 핵심 원천기술 확보에 나섰다. 이러한 성과는 이후 2024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ETRI는 이후 CPS 기술을 스마트팩토리와 디지털트윈 분야로 확대 적용했다. 독일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스마트팩토리 연구랩을 운영하며 제조설비와 디지털 환경을 연동하는 플랫폼을 개발했고, 생산설비 연동 미들웨어 기술도 함께 확보했다.

또한 ETRI는 국방 분야의 DDS(Data Distribution Service, 데이터 분산 서비스) 통신 미들웨어 ‘EDDS(ETRI-DDS)’를 개발하며 외산 의존도가 높던 국방 통신 시스템을 국산화했다. 이어 LVC1)LVC: Live(실기동훈련), Virtual(모의장비훈련), Constructive(전투지휘훈련)의 줄임말로 그동안 군에서의 전투훈련은 LVC가 각각 진행됐다. 게이트웨이 기술을 통해 실제 기동훈련과 가상훈련 시스템을 하나로 연동하는 기술도 확보했다.

수십 년간 ETRI의 SW 연구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산업의 기반을 만들고, 기술 자립의 토대를 다져온 시간이었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초연결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기술의 아래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ETRI의 SW 연구가 존재한다.

스마트공장을 위한 디지털트윈 개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