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의 부모가 자기 편의를 위해 태블릿PC를 사준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그 전에 무엇을 시도했는지 보여주지 않지만, 친구가 없는 아이를 도울 마지막 방법으로 릴리패드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요즘 같은 세상에서 여덟 살까지 전자기기 없이 논다는 것이 더 힘들다. 그건 빌 게이츠, 피터 틸, 스티브 잡스 같은 부유한 가족의 아이들이나 하는 일이다.
물론 보니는 언어를 배우는 영아가 아니라 친구 관계를 고민하는 여덟 살 아이다. 위 연구를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상적인 대면 상호작용 중에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의 존재나 사용이 끼어들어 그 상호작용을 방해하거나 중단시키는 ‘기술간섭(technoference)’ 관련 연구가 보여주듯, 기술은 적절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관계를 방해한다.
실제로 보니는 릴리패드를 통해 사귀게 된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큰 실망을 맛보게 된다. 같은 곳에 모였어도 함께 놀지 않고, 나중엔 사이버불링(cyberbullying)까지 당했기 때문이다. 역시 릴리패드가 문제였을까? 아니다. 문제는 기술에 나쁜 역할을 맡길 때, 그러니까 기술이 인간 관계를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해야 할 반응을 대신할 때 생긴다.
이 점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장난감, 제시였다. 제시는 오랫동안 옛 주인 에밀리에게 버림받았다고 믿어왔다. 영화 후반, 그것이 오해였음이 드러난다. 에밀리는 자라면서 다른 것을 좋아하게 됐을 뿐, 제시를 잊지 않았다. 이 깨달음 끝에 제시는 말한다.
“보니는 자란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될지 결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그 순간 우리가 곁에서 도왔다는 사실뿐이다.” 1)Bonnie’s growing up. And we don’t get to decide when and how that happens. All that matters is we were there at the right time to help her along.
여기서 관점이 전환된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서, ‘아이와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좋은가,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가’로. 릴리패드 같은 기기는 정확하게 그 반대로 작동한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부모가 없어도 부모가 원하는 아이로’ 키워주겠다고 ‘통제 가능성’을 판다. 반면 제시가 도달한 결론은 통제란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것, 가능한 것은 오직 곁에 머무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보니는 결국 장난감 친구들과 릴리패드의 도움을 통해 진짜 친구 블레이즈를 만난다. 빈약한 태블릿PC의 콘텐츠가 아니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같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되지도 않는 것까지 포함해 마음껏 함께 상상력을 펼치며 놀 수 있는 친구다. 여기서 기술과 장난감은 인간을 대신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데 애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