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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6 201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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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들의 애환이 벽화로 승화하다
수암골의 유래

2014년 12월 현재의 수암골은 역사라기보다는 하나의 콘텐츠다. <카인과 아벨, 2009>, <제빵왕 김탁구, 2010>, <영광의 재인, 2011> 등 한때 지상파 드라마의 촬영장소로 더 익숙한 곳.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곳을 찾을 때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 채 웃음을 머금고 온다.

그러나 막상 마을에 들어서면 익살스럽고 재치있는 벽화 너머로 왠지 모를 아련함이 느껴진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그 속에는 어떤 사연들이 담겨 있을지, 이곳의 사람들은 왜 꼭꼭 붙어있는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 문득 수암골의 과거가 궁금해진다.

수암골. 수동과 우암동 경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의 역사는 1950년대인 한국전쟁 이후부터 시작됐다. 6.25 전란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보따리를 동여매고 피란길에 올랐다. 청주역과 가까운 수암골은 기차를 타고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이 모이기 적당한 지점이었다. 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자 난리통 속에도 장이 섰고, 사람들은 시장과 가까운 이곳에 마을을 이뤄 의식주를 해결했다.

그렇게 10~20년이 흘렀고 청주시에서는 피란촌이 되어버린 이곳에 그나마 최소한의 모양을 갖춘 집을 지어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현재 수암골 대부분의 집들은 1960~70년대 당시 거주지 형태 그대로여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활기넘치는 마을로

수암골이 '벽화마을'이라는 이름을 입게 된 것은 2007년부터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곳 마을의 벽들은 알록달록한 모습으로 화사하게 단장했다. 이홍원 화가를 비롯하여 충북에 거주하는 화가들과 대학생들이 모여 '추억의 골목 여행'이라는 주제로 자유롭게 벽화를 그렸다. 리어카도 올라가지 못하는 좁다란 골목길을 사람들은 부지런하게 오고가며 붓질을 했다. 이광진 화가를 중심으로 수암골의 벽화 프로젝트는 그렇게 진행됐다.

"이광진 화가는 지금도 여기에 살아. 그 때 벽화를 그려준 김성심, 박경수 화가도 자주 놀러오지. 참 고마운 사람들이야."
4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구멍가게인 삼충상회 박만영 할아버지는 벽화가 그려진 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지금이 훨씬 좋다고 하신다.
"사람 사는 곳에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해야지. 안 그래? 이전에는 쓸쓸하고 적막했어. 그런데 여기에 벽화를 그려서 마을을 예쁘게 해준다고 하더라고. 아, 얼마나 고마워. 우리 가게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한테 물도 떠다주고 편히 앉아서 붓질하라고 의자로 쓸 목재도 내 줬어. 모두가 함께 한 그림들이지."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담장, 무질서하게 걸쳐있는 슬레이트, 쓸쓸함이 배어 나오는 가파른 비탈길은 모두 예술작품으로 거듭났다. 사람들은 허물어진 담에 익살스러운 그림을 그려 넣었고, 다 쓰고 하얗게 새어버린 연탄재도 훌륭한 도화지로 변신했다. 또한 여기저기 툭 튀어나온 전봇대에도 붓질로 생기를 불어넣어 흡사 3D 입체영상 같은 그림을 감쪽같이 그렸다.

비스듬히 보수한 시멘트 벽면은 마을의 골목지도를 입체적으로 표현했고, 좌우의 길이가 맞지 않는 집의 벽은 마을을 지키는 호랑이를 그려 넣기에 안성맞춤이다. 보수를 한다고 아무렇게나 타일이 붙어버린 담에도 그림이 그려졌다. 타일 한장 한장마다 작지만 익살맞은 그림들이 알차게 들어섰다. 어린이부터 청소년, 청년, 할머니와 할아버지까지 마을을 아름답게 만들기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장씩 ‘타일 도화지’를 받았고, 사람들은 이 작은 백지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연인과의 사랑을 표현하기도 하고 소중한 가족의 얼굴을 담거나 때로는 진한 우정을 채운 그네들의 이야기.
오밀조밀 골목으로 퍼지는 구수한 커피향

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마을 풍경을 음미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면 한 시간 이내에 수암골의 모든 집들과 벽화를 다 둘러볼 수 있다. 이곳은 꽃피는 봄과 풀들이 무성한 여름에도 아름답지만 겨울의 풍경도 그에 못지않다. 혹자는 겨울이라서 스산하다고도 하나, 추운 날의 여행은 따뜻한 날의 풍경을 상상하며 유영(遊泳)하는 법 아니던가. 또한 겨울의 수암골은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지도록 하는 운치가 있기에 색다른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수암골이 드라마의 명소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처럼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잔잔한 여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밀조밀 연결된 골목, 그 사이로 피어나는 조그마한 들풀. 사람들이 수암골에 매료되는 이유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속속 수암골을 찾아오고 있다.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때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수암골을 담백한 관광명소로 만든다면 어떨까. 영국의 노팅힐이 그렇지 않은가. 영국의 평범한 거리는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의 러브스토리를 통해 세계적인 명소로 거듭났다. 우리의 수암골 또한 '한국판 노팅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 맥락과 현대적 의미를 모두 갖고 있으니 결코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여러 생각에 잠겨서 골목 사이사이를 걷다보면 어느새 저 밑으로 여러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뒤로 하고 온기 가득한 찻집에서 구수한 커피 향을 음미하는 기분. 이는 우리가 여행길에 오르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만끽했다면, 돌아가는 길에 마을 초입에 있는 김탁구 빵집으로 유명한 팔봉제빵점에 들러서 보리봉빵을 맛보는 것도 좋겠다. 운치 있는 마을 정경과 어울리는 벽화 가득한 수암골 여행은 어찌보면 현실 속 시간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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