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th SPECIAL
Vol.262 Ap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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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3

ETRI 50년사

대한민국 ICT 혁신의 궤적

ETRI는 1970년대 중반 ‘통신·전자 기술의 국산화’라는 국가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연구조직에서 출발해, 50년 동안 대한민국 ICT의 산업화·세계화·지능화를 함께 견인해 왔다.
ETRI의 성과는 단일 기술의 개발에 머물지 않고, 국가기간 인프라 구축(교환·전송·무선) → 핵심 부품·소자·SW 역량 축적 → 표준화·특허·기술이전을 통한 산업 생태계 확산 → 공공·사회문제 해결로의 확장이라는 ‘가치사슬’을 형성해 왔다. 이러한 구조는 시대별로 주력 기술이 바뀌더라도 연구성과의 사회적 환류를 가능하게 한 핵심 장치였다.
50년사에서 특히 중요한 변화는 두 가지다. 첫째, 1980~90년대 기간망 국산화·상용화 중심의 추격형 연구에서, 2000년대 이후 국제 표준을 선도하는 first mover형 연구로의 전환이다. 둘째, 단일 제품/장비 개발을 넘어 데이터·플랫폼·SW 중심의 연구로 이동하며 ‘개방형 생태계’ 전략(표준특허, 오픈 API, 데이터 공개 등)이 강화된 점이다.
본 원고는 ETRI 50년사 자료를 근거로 1976년부터 2026년까지의 흐름을 10년 단위로 구분해 주요 조직 변화, 대표 연구성과, 산업·사회적 파급을 핵심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한다. 지면 제약상 모든 분야를 망라하기 어렵기 때문에 통신·네트워크, 컴퓨팅·SW, 방송·미디어, 인공지능 및 응용(언어·헬스케어 등) 등 ETRI의 정체성을 형성한 축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각 시기별 설명은 (1) 정책·시장 환경, (2) 연구개발 전략과 수행 방식, (3) 대표 성과와 확산(표준화·기술이전·사업화), (4) 다음 시기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의 순서로 구성하였다.

글. 엄낙웅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연구전문위원·ETRI 50년사 편찬위원장

50년사 개관: 10년 단위 키워드와 연구 축

ETRI의 50년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연결(Connectivity)’과 ‘지능(Intelligence)’이다. 초기에는 전화·전송망의 물리적 연결이 우선 과제였고, 1990년대에는 이동통신과 인터넷 접속을 통해 연결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2000년대는 이동형 멀티미디어, 모바일 인터넷, 광대역 무선으로 ‘언제 어디서나’ 연결을 구현했고, 2010년대에는 5G와 AI가 결합하며 연결이 서비스 혁신의 기반으로 전환되었다. 2020년대에는 지상-공중-우주를 포괄하는 6G 비전과 초지능 서비스가 동시에 요구된다.

또 하나의 축은 ‘연구-산업-공공’의 연결이다. ETRI는 국가 대형 과제에서 축적한 원천기술을 표준화·특허로 보호하고, 기술이전과 공동 연구로 산업화를 촉진해 왔다. 동시에 국제행사·공공현장 실증(예: 5G 시범서비스, 자동통역 서비스 등)을 통해 기술의 사회적 수용성을 높였다.

표 1은 10년 단위로 정리한 ETRI의 대표 키워드와 성과를 요약한 것이다. 이후 절에서는 각 시기의 배경과 성과를 보다 상세히 서술한다.

※ 본 표는 ETRI 50년사를 10년 단위로 압축 정리한 것이다.

태동과 기반 구축(1976~1985)

1970년대 한국은 산업화의 고도화와 함께 통신 수요가 급증했지만, 핵심 장비·부품의 해외 의존도가 높아 확장 속도와 비용 측면에서 제약이 컸다. 이에 정부는 통신과 전자기술의 국산화를 추진하기 위한 전문 연구기관 설립을 적극 검토했고, 1976년 말 통신(KTRI)·전기(KERTI)·전자(KIET) 분야의 전문 연구조직이 각각 출범하였다.

KERTI는 전력기기 시험·인증이라는 산업 기반 기능을 담당하며 창원에 설립되었고, KIET는 반도체·컴퓨터를 포함한 전자기술 연구개발과 시험 생산까지 포괄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 초기에는 시설·자금·인력 제약이 컸으나, 1977년 말부터 연구개발 체제가 정비되며 본격적인 기술 축적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국가적 난제는 ‘전화적체’였다. 전화교환·전송망의 확충은 경제·사회 활동의 기반이었지만, 장비 수입에 의존할 경우 비용 부담과 기술 종속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ETRI는 교환기 국산화를 핵심 과제로 설정하고, 시스템 설계·제어·시험·운용관리까지 포함하는 전주기 기술을 축적해 나갔다.

대형 국책 과제 수행 경험은 이후 ETRI의 ‘프로젝트형 연구개발’ 전통을 만들었다. 수백 명 규모의 연구·시험 인력, 산업체 협력, 단계별 실증과 품질관리 체계를 운영하는 방식은 훗날 이동통신·광통신·AI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된다.

태동기의 연구는 교환·전송에만 머물지 않았다. 공중전화기의 잦은 고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ETRI는 1980년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 DDD(장거리자동전화) 공중전화기’ 개발을 시작해 1983년 개발에 성공하였다. 인텔 8048 기반 회로 설계와 2KB ROM 상에서의 동작 구현 등은 당시로서는 선진국에서도 보기 드문 도전이었다.

또한 전화선을 이용한 문서 작성·전달이라는 아이디어 아래, 1985년 Z-80 기반 텔레텍스 단말기(모뎀·프로토콜·한글 워드프로세서 SW 포함)가 개발되었다. 비록 상용화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한글 워드프로세싱과 통신 프로토콜 구현 경험은 이후 PC통신, 인터넷 접속, 지능형 서비스 개발로 이어지는 기반이 된다.

1976~1985년은 ‘조직·인력·시험·프로젝트 운영’이라는 연구 인프라가 구축된 시기였다. 이 기반은 1986년 이후 통합 ETRI 출범, TDX 상용화 확산, 이동통신 도전과 같은 대형 과제를 감당할 수 있는 체력으로 이어진다.

(위) 1976년 12월 30일,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가 경북 구미에 설립됐다.
(왼쪽) 1976년 12월 30일, 정부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KERTI)를 발족했다.
(오른쪽) 1977년 12월 10일, KSTI 부설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가 통신 분야 전문 연구소로 독립했다.

도약과 산업화(1986~1999)

1980년대 정보화의 바람 속에서 컴퓨터·반도체·통신 기술의 융합이 강조되었고, 전자와 통신을 결합한 전문 연구기관의 필요성이 커졌다. 1985년 3월 26일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와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의 통합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가 출범하면서, ‘전자+통신’ 융합 연구체계가 본격 가동되었다.

통합 이후 ETRI는 기간망 분야의 대형 연구개발을 지속하는 한편, 컴퓨팅·SW·반도체·단말 등 다양한 축을 강화해 ‘국가 ICT 종합 연구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갔다. 또한 1996년부터는 KIST 부설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의 소속 변경과 흡수·통합(1998년)을 통해 시스템·SW 역량을 제도적으로 강화했다.

이 시기의 상징적 성과는 TDX 상용화의 확산이다. TDX는 교환기 개발·생산국이었던 일부 선진국의 기술 장벽을 넘어, 한국이 디지털 전화망을 독자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개발 단계는 TDX-1X, TDX-1, TDX-1B, TDX-10 등으로 이어지며 용량과 기능이 고도화되었고, 각 단계는 실개통과 망 적용을 통해 검증되었다.

1982년 7월 26일, 3차 시험기(TDX-1X)는 362회선 가입자를 대상으로 현장 시험 운용을 개시했다.

TDX는 기술적 성공을 넘어 경제적·산업적 성과로도 평가된다. 생산유발, 수입 대체, 기술료 절감, 신규 산업 창출 등 파급효과가 보고되었고, 일부 기간의 국내 생산유발 효과가 수조 원 규모로 추정되기도 했다. 더 중요한 점은 TDX 개발 과정에서 축적된 ‘대형 시스템 설계·시험·운용관리’ 역량이 이동통신·광통신·SW 플랫폼 개발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화 보급이 확대되면서 통신 서비스는 단순 음성 통화에서 부가서비스로 확장되었다. 시간대별 수신 위치 변경, 융통성 있는 통화료 부과, 음성 기반 다이얼링 등 새로운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지능망(Intelligent Network) 개념이 등장했고, ETRI는 KT 등과 함께 SCP·SMS, STP, SSP, 신호망 관리 시스템(SIGNOS) 등의 개발을 추진했다. 이는 ‘서비스 생성 환경’을 통해 통신서비스를 빠르게 기획·배포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또한 1990년대 후반에는 PC통신 중심에서 개방형 인터넷으로 이동하는 전환기에 대응해, 인터넷 가입자 정합, 프로토콜 처리, 운용관리 등 접속 시스템 기술이 개발·이전되었다. 이 흐름은 2000년대 광대역 인터넷 대중화와 서비스 플랫폼 확산으로 이어진다.

디지털 이동통신은 국가 ICT 경쟁력의 핵심 영역으로 부상했다. ETRI는 기술 도입이 쉽지 않던 상황에서 CDMA의 성장 가능성을 검토하고 퀄컴과의 공동 연구를 결정하는 등 ‘선택과 집중’ 전략을 실행했다. 1996년 CDMA 상용화 성공은 한국이 단기간에 이동통신 선도국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핵심 모뎀 기술의 해외 의존은 다음 과제로 남았다.

이에 ETRI는 3세대(IMT-2000) 기술개발 과정에서 CDMA2000 시스템의 독자 모뎀 설계·구현·상용화에 집중하고, OCQPSK, AISMA 등 핵심 기술을 확보해 지식재산권을 축적했다. ‘모뎀 자립’ 노력은 2000년대 이후 3G/4G 표준 경쟁에서 중요한 기반으로 작동한다.

기간망과 이동통신이 ‘연결’을 확장했다면, 컴퓨팅·SW는 ‘활용’을 확장했다. ETRI는 주전산기(TICOM 계열) 개발을 통해 고성능 컴퓨팅 기술을 축적했고, DBMS ‘바다’ 시리즈를 통해 관계형 DBMS에서 객체지향·멀티미디어·인터넷 환경으로 기술 범위를 넓혀 갔다. 바다 DBMS는 기술이전과 창업으로 연결되며 국내 DB 산업 생태계 형성에 기여했다.

우리나라가 1M DRAM의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던 1980년대 중반, 반도체 선진국인 미국이나 일본은 이미 4M DRAM의 실험 시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1985년 전 세계 반도체 업계 1위는 일본 NEC였고, 당시 세계 반도체 순위 10위 안에 드는 일본 업체가 무려 5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정부는 반도체 개발을 앞당기기 위해 1986년 특정 연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초고집적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 사업’ 계획을 수립하였다. 1989년 3월까지 0.8㎛ 선폭의 4M DRAM을 개발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단계별 목표가 설정됐다. 그리고 1986년 8월, 과학기술처, 체신부, 상공부 3개 부처가 공동명의로 작성한 ‘초고집적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안’이 통과됨으로써 4M DRAM의 공동개발이 정부 방침으로 최종 확정됐다. ETRI가 연구개발을 총괄하고 삼성반도체통신·금성반도체·현대전자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4M DRAM 공동개발은 ETRI가 연구개발의 총괄관리와 설계, 생산, 기본기술 개발을 지원하며, 참여기업들은 설계, 생산과 기본기술 개발을 담당하고 기업의 기술능력에 따라 독자개발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연구원들의 사활을 건 노력으로 1989년 2월, 4M DRAM 개발에 성공했다.

한편, 공동개발팀은 4M DRAM의 개발이 완료되기 전인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선진국들이 이미 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16M DRAM과 64M DRAM의 개발 타당성을 검토했다. 그리고 4M DRAM 개발 종료 시점에서 곧바로 착수해야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차세대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을 추진했다.

4M DRAM 개발과 마찬가지로 ETRI가 공동개발을 총괄하고 4M DRAM에 참여했던 3개 기업과 금호석유화학을 비롯한 6개 업체, 2개의 정부출연연구기관,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19개 대학 등이 참여했다. 공동개발은 계획에 따라 차질 없이 진행되어 1991년 3월, 시제품에 대한 검증과 평가까지 마침으로써 우리나라는 일본과 거의 같은 시기에 16M DRAM 개발에 성공하고 당당히 반도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됐다. 그리고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RAM을 개발함으로써 드디어 일본을 따라잡았다. 이후 1994년, 256M DRAM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가 현재까지 세계 메모리 반도체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고수하는 발판이 됐다.

1986~1999년은 ‘상용화 경험’과 ‘산업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였다. TDX의 성공, CDMA 상용화, DBMS·SW 기반 강화, DRAM 개발은 2000년대의 first mover형 혁신(3G/4G, WiBro, DMB, 디지털 방송)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연결고리가 된다.

혁신과 융합(2000~2009)

2000년대는 ETRI 연구가 국가기간망 중심의 거대 과제에서 벗어나, 기술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혁신을 모색한 시기다. 정부의 ICT 융합 정책에 따라 ICT+바이오, ICT+로봇 등 융합형 R&D가 추진되었고, 소프트웨어 기능이 통합·조정되며 연구 규모와 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시기 대표 성과는 ‘IMT-2000’, ‘WiBro’, ‘지상파 DMB’, ‘AMOLED 구동 기술’, ‘고성능 서버’, ‘익명인증 등 정보보호 기술’ 등으로 요약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과가 ‘세계 최초/선도’라는 타이틀과 함께 국제 표준화·기술이전·상용화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3세대 이동통신(IMT-2000) 경쟁에서 ETRI는 동기식 CDMA2000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W-CDMA 상용시스템 개발을 조기에 착수했다. 1999~2001년에는 정부·산업체·사업자가 역할을 분담하는 공동연구 체계로 단말·기지국·핵심망·시험 과제를 수행하며 짧은 시간 안에 기술개발을 완성했다.

1999년, ETRI는 국내 업체와 공동개발을 통해 동기식 IMT-2000(CDMA2000) STP시스템 개발에 성공했다.

2003년 W-CDMA 상용서비스 성공 이후 3G의 전송속도·용량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4G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이는 2007년 LTE/SAE 요구사항 만족 기술 구현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동통신은 ‘연구-표준-상용화’가 가장 촘촘히 연결되는 영역이었고, ETRI는 국제 표준 경쟁에서 국내 산업계의 ‘집단적 학습’을 촉진하는 허브로 기능했다.

유선 중심의 인터넷 환경이 모바일로 확장되며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했다. ETRI는 휴대용 인터넷 서비스인 WiBro 개발에 도전해 2004년 11월 기지국과 단말기로 세계 최초 접속에 성공하며 기술 가능성을 입증했다.

WiBro는 국내외 상용화 경로가 단순하지 않았지만, OFDMA 기반 무선접속, 이동성 지원, 네트워크 연동 등 핵심 기술 요소를 축적해 4G/5G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레퍼런스로 남았다. 또한 WiBro 경험은 ‘대규모 필드 테스트’와 ‘서비스 사업자 협업’이라는 운영 역량을 강화했다.

방송 분야에서는 디지털 전환이 급격히 진행되었다. 2001년 디지털 라디오 방송 기술개발을 시작으로 DAB 기반 이동멀티미디어 방송 서비스가 기획되었고, 2002년부터 지상파 DMB 시스템 개발이 추진되었다. DMB는 2005년 12월 본방송이 시작되며 ‘내 손안의 TV’라는 새로운 이용 경험을 제시했다.

DMB는 기술적 생명주기가 길지 않았지만, 국내 디지털 방송 기술을 앞당기고 국제 표준화(ETSI/ITU-R 권고안 채택 등)를 촉진하는 촉매로 작동했다. 2006~2009년에는 AT-DMB(Advanced Terrestrial DMB) 기술 개발을 통해 전송 효율과 화질을 개선하며 후속 진화도 시도되었다.

200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은 ‘연구성과의 확산 구조’가 정교해졌다는 점이다. 국제 표준화에의 적극 참여, 표준특허 확보, 기술이전과 공동 연구, 그리고 연구소기업·스핀오프의 증가가 동시에 나타났다.

특히 이동통신과 방송 분야는 글로벌 표준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에, R&D 초기부터 표준 문서와의 정합성, 시험·인증, 현장 실증이 연구 설계의 일부로 내재화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2010년대 5G, 2020년대 6G의 ‘표준-실증 동시 추구’ 모델로 발전한다.

정리하면 2000~2009년은 ETRI가 first mover형 연구로 전환하며 글로벌 ICT 경쟁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였다. 3G/4G, 모바일 광대역(WiBro), 이동멀티미디어(DMB), 보안·서버·디스플레이 등 다변화된 성과는 2010년대의 5G와 AI, 클라우드·플랫폼 전략으로 이어진다.

세계 선도와 플랫폼 고도화(2010~2021)

2010년대 ICT는 스마트폰 확산과 데이터 트래픽 폭증, 클라우드·AI의 부상으로 ‘초고속·초저지연·초연결’ 요구가 동시에 증가했다. ETRI는 2013~2018년 기가코리아 사업의 일환으로 밀리미터파 5G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GK-5G)을 추진해 20Gbps급 기지국, 기가급 모뎀, 엑스홀(무선 백홀) 기술, 규격 개발과 국제표준화를 목표로 했다.

연구 결과 개발된 허브·터미널 기술은 상용 LTE 소형셀의 이동 백홀에 적용되어 이동 환경에서의 서비스 제공을 실증했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5G 시범서비스에도 적용되며 ‘세계 최초 수준의 5G 체감 서비스’ 경험을 제시했다. GK-5G는 표준특허 확보와 국내 장비제조업체 경쟁력 강화라는 산업적 성과로도 연결되었다.

5G는 밀리미터파 등 고주파 대역을 활용하면서, 기존과 다른 전파전달 특성과 모델링이 필수 과제가 되었다. ETRI는 2012년 SHF·EHF 이동통신 연구반을 구성해 실환경 전파특성 측정 캠페인을 추진하고 28GHz·38GHz 대역의 측정 기반 전파모델을 개발했다.

국제 표준화 측면에서도 WRC-15 이후의 주파수 확보 논의에 대응해 ITU-R 기고 등을 통해 전파모델을 국제 표준으로 만드는 연구를 병행했다. 이는 ‘주파수’라는 공공 자원과 ‘표준 모델’의 결합이 글로벌 생태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유무선 트래픽이 폭증하면서 광전송과 광액세스 기술의 중요성도 급격히 커졌다. ETRI는 100G 이더넷·광전송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FTTH 고도화를 위해 NG-PON2 등 차세대 광인터넷 기술 개발을 추진하며 ‘100배 빠른 광인터넷’ 기술을 제시했다.

또한 SDN 기반 유무선 액세스 통합, 분산 안테나 시스템(DAS)과의 연동, 촉각 인터넷 등 초저지연 네트워크 기술은 이후 원격 협업, 실감형 서비스, AI 데이터센터로 이어지는 기반이 된다.

AI는 2010년대 중반 이후 ICT 경쟁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ETRI는 2013년부터 솔트룩스, KAIST 등과 함께 한국형 AI ‘엑소브레인’ 과제를 수행하며 심층 질의응답, 한국어 언어분석, 언어모델 기반 응용, 지식베이스 추론 등 핵심 기술을 축적했다.

엑소브레인은 2016년 EBS 장학퀴즈에서 우승하며 ‘국산 AI의 가능성’을 대중적으로 입증했고, 2017년 이후에는 언어지능 기술과 학습 데이터를 오픈 API·데이터 포털로 공개하는 등 생태계 확산 전략을 강화했다. 이러한 접근은 2020년대 초거대 언어모델 시대에 ‘공공 R&D의 개방과 확산’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ETRI는 1990년대부터 자동통역 핵심기술을 축적해 2012년 모바일 자동통역 앱 ‘지니톡’을 공개하고 대국민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니톡은 직관적인 UI와 높은 수준의 통역 성능을 지향했으며, 2014년에는 단말탑재형 지니톡을 개발해 데이터 요금 부담과 연결성 문제를 줄이는 방향으로 고도화되었다.

또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등 국제 행사에서 다국어 자동통역 실증이 추진되며 ‘언어장벽 없는 서비스’라는 비전이 구체화되었다. 음성 기반 내비게이션, IPTV, 영어 말하기 교육 등 음성 인터페이스의 다양한 응용은 사용자 경험(UX) 중심 연구가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2010년대 후반에는 양자컴퓨팅, 바이오인식, 재난·재해 대응 등 사회적 수요 기반 연구도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양자컴퓨팅 시스템 설계·분석·평가·검증을 위한 통합 기술 개발은 장기적 관점의 미래 대응형 연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다변화는 2020년대 ‘임무 중심’ 연구로의 전환과도 맞닿아 있다.

2010~2021년은 5G와 AI가 ETRI 연구의 중심축이 되며, 기간망-플랫폼-SW·AI-서비스로 이어지는 ‘가치사슬형 연구’가 정착된 시기다. 이 체계는 2020년대 6G와 초거대 AI의 동시 전환기에 대응하는 기반으로 작동한다.

2016년, ETRI는 4G 이동통신에서 20ms(0.02초) 이상이었던 서비스 지연을 10분의 1인 2ms까지 줄인 ‘5G 저지연 이동통신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전환과 확장(2022~2026)

2020년대는 초연결 지능사회가 본격화되며, 통신·네트워크는 국가 필수 인프라이자 산업 혁신의 핵심 엔진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ETRI는 5G+ 및 6G 이동통신, 차세대 네트워크, 위성통신/비지상망(NTN), 전파자원 효율화, 광·무선 소재·부품 등으로 연구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특히 6G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ETRI는 2020년 ‘6G 비전’을 정립하고 『6G 인사이트: 비전과 기술』을 발간하며 글로벌 논의를 주도했다. 이 비전·구상은 ITU-R의 IMT-2030(6G) 프레임워크에 활용 시나리오와 포괄적 원칙, 5G·6G 관계/구조도 등으로 반영되며 국제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

기술적으로는 세계 최초 200Gbps급 6G 무선링크 시연 등 초광대역 무선전송 실증이 보고되었다. 또한 5G 이론 최고속도(20Gbps) 대비 대폭 향상된 성능을 구현하는 등 6G급 기술 실증이 이어지고 있다.

2024년, ETRI는 6G 이동통신 개념증명(PoC) 시스템을 개발해 세계 최초로 200Gbps급 6G 무선링크 시연에 성공했다.

한편 정부는 2024~2028년 ‘차세대 네트워크(6G) 산업 기술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ETRI는 Extreme MIMO, vRAN, AI-RAN 등 핵심 기술을 선도적으로 개발하고 2026년 Pre-6G 시연과 2028년 6G 서비스 시연을 주도하는 로드맵을 수행 중이다. 이러한 접근은 ‘원천기술→표준→실증→산업화’를 병렬로 추진하는 6G 시대 R&D 전략의 전형을 보여준다.

통신망은 SW 기반으로 재구성되며 오픈랜(Open RAN)과 지능형 RAN 제어가 중요해졌다. ETRI는 오픈랜 지능화를 위한 무선 지능형 제어, 지능형 RIC 플랫폼 등 관련 기술을 확보해 망 최적화 작업의 자동화와 5G 특화망 구축·운영 효율화 기반을 제시했다.

이러한 흐름은 단일 벤더 중심의 폐쇄형 구조에서, 다수 제조사의 상호운용을 보장하는 개방형 표준·사실표준으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산업 구조 변화와 직결된다.

AI 분야에서는 초거대 언어모델과 멀티모달 모델의 확산에 맞춰, 설명 가능한 AI, 공공서비스 적용, 헬스케어·돌봄 등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가 확대되고 있다. 예컨대 음성·텍스트 분석 기술과 대규모 언어모델을 결합한 ‘치매 예측’ 연구는 국제 챌린지에서 최고 수준 성능을 달성하고, 복지센터 등 현장 실증으로 연결되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2023년에는 AI 기반 회의록 작성, 실시간 자막 통역 등 다양한 공공 서비스 적용 사례가 확대되었고, 현장 운영을 통해 데이터·모델·UX를 개선하는 방식의 ‘운영형 R&D’가 강화되는 추세다.

언어기술은 공공 현장으로의 확산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23년 이후에는 투명디스플레이 기반 대화형 자동통역 서비스 기술을 확보하고, 지하철역에 외국어 동시 대화 시스템을 설치해 시범 운영과 본격 서비스(다수 역 설치)로 확장하였다. 이는 ‘기술 시연’에서 ‘서비스 운영’ 단계로 연구의 완결점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비스형 기술은 정확도뿐 아니라 개인정보·보안, 장애 대응, 현장 소음 환경 적응, 운영 비용 등 비기술 요소가 성패를 좌우한다. 따라서 현장 실증을 통해 요구사항을 재정의하고, 표준·가이드·운영 프로세스로 정리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AI 학습·추론 수요가 폭증하면서 데이터센터 자체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가 되었다. ETRI는 원격 메모리 접속 표준(CXL)과 광스위치를 연동하는 방식 등 고성능·저지연·에너지 효율형 AI 데이터센터 구현을 위한 광연동 기술을 연구하며, ‘필요한 순간 필요한 만큼 자원을 연결·분리’하는 유연한 자원 구조를 제시했다.

이는 네트워크가 단순 연결을 넘어 ‘컴퓨팅 자원 구성의 일부’로 통합되는 추세를 반영한다. 6G/AI 시대에는 무선·유선·광·컴퓨팅이 결합된 통합 최적화가 요구될 가능성이 크다.

2022~2026년은 6G/AI라는 초거대 전환기를 맞아, ETRI가 ‘비전-원천-표준-실증-산업화’를 동시 추구하는 복합 전략을 강화하는 시기다. 기술의 성능뿐 아니라 신뢰성·책임성·개방성이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는 만큼, 연구개발 운영 방식과 거버넌스의 혁신도 병행되어야 한다.

ETRI 50년의 교훈과 다음 10년의 과제

ETRI 50년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성공 요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국가가 당면한 기간 인프라 문제(전화적체, 이동통신, 광대역망 등)를 R&D의 출발점으로 삼고, 실증과 상용화까지 연결했다. 둘째, 표준화·특허·기술이전을 통해 연구성과를 산업 생태계로 확산시키며, 연구소-기업-정부의 역할 분담을 구조화했다. 셋째, 시대가 바뀔 때마다 연구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 통신망 중심에서 플랫폼·SW·AI 서비스까지 연구 범위를 확장했다.

다음 10년(2026 이후)의 과제는 초연결 네트워크와 초지능 서비스가 결합하는 환경에서 기술 경쟁력과 공공성을 동시에 만족하는 혁신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6G는 AI·SW 기반 네트워크로 진화하며 자동 최적화와 지능화를 요구한다. 동시에 AI는 사회 전반의 신뢰와 안전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변모한다.

따라서 ETRI의 역할은 (1) 6G/AI 핵심 원천기술의 국제 표준 선도, (2) 오픈 생태계(오픈 API·오픈소스·데이터) 기반 혁신 촉진, (3) 공공 서비스에서의 책임 있는 적용과 실증, (4) 중소·중견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공급망/검증 체계 구축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50년의 경험이 다음 10년의 신뢰 기반 혁신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ETRI 50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큰 특징은 연구 주제가 개별 연구자의 관심에서만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전화 적체 해소, 이동통신 전환, 광대역 인터넷 보급, 디지털 방송, 5G/6G, AI 기반 공공서비스처럼 국가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와 기회에서 직접 도출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 설정은 연구의 공공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장기간의 정책 지원과 산업계 참여를 가능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연구성과가 실험실 수준을 넘어 국가 인프라와 시장으로 빠르게 이전되는 토대를 만들었다.

초기의 TDX 개발은 단순한 교환기 국산화를 넘어 대형 시스템 통합, 시험·검증, 현장 개통, 품질관리 역량을 한꺼번에 축적한 사건이었다. 이후 CDMA, IMT-2000, WiBro, GK-5G, 6G 선행연구에 이르기까지 ETRI는 요소기술의 우수성만이 아니라 “실제 망에서 작동하는가”, “사업자와 제조사가 채택할 수 있는가”, “국제 표준과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을 동시에 다루는 방식으로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시스템 수준의 문제 해결 능력이 ETRI를 다른 연구기관과 구별하는 핵심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다.

ETRI 성과의 산업적 지속성은 표준화와 지식재산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1980~1990년대에는 ITU, ISO 등 국제표준화 활동을 통해 국내 기술의 국제 정합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3GPP, ETSI, ITU-R 등 글로벌 표준 무대에서 요구사항 제안, 규격 반영, 표준특허 확보까지를 연구개발의 일부로 내재화하였다. 즉, 표준화는 연구가 끝난 뒤의 후속 절차가 아니라 연구 목표와 평가 체계 속으로 편입된 ‘동시 수행 과제’가 되었다.

인공지능 표준화 공동조정그룹(JCA-AI) 출범이 공식 승인된 2026년, ITU-T 전기통신표준화자문반(TSAG) 회의 전경(출처: ITU)

기술이전과 창업 역시 같은 구조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다(DBMS) 계열 기술의 사업화, 내비게이션·서버·네트워크·광통신 분야의 기업 설립과 연구소기업 확산, 2010년대 이후 팀 단위 창업 사례 등은 ETRI가 단순한 성과 발표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 생태계를 재편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넓혀 왔음을 보여준다. 개별 기술의 상업적 성패는 서로 달랐지만, 축적된 특허·표준·기술이전 경험은 국내 기업이 후속 세대 기술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진입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2010년대 중반 이후 ETRI 연구의 또 다른 변화는 성과의 평가 기준이 “기술 우수성”에서 “사회적 수용성과 책임 있는 운영 가능성”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엑소브레인 언어기술의 오픈 API·데이터 공개, 지니톡의 국제행사 실증, 재난정보 서비스와 공공 현장 자동통역의 운영 사례는 공공 R&D가 개방형 플랫폼과 국민 체감형 서비스라는 두 축을 동시에 갖추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는 연구기관의 성과가 논문과 특허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 이용자 경험과 제도·운영 프로세스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재정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20년대 들어 AI 중심 기관 전환, AI안전연구소 설립, 임무중심 연구개발 혁신, ESG 경영 강화 등은 이러한 흐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향후 6G/AI 시대에는 성능 경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신뢰성·설명가능성·보안·상호운용성·개방형 공급망을 함께 설계하는 연구개발이 필요하다. ETRI의 다음 10년은 바로 이 지점, 즉 첨단기술과 공공가치의 균형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에 의해 평가될 가능성이 크다.

결론

ETRI 50년사는 한국 ICT 발전사가 “연결의 역사”에서 “지능의 역사”로 이동해 온 과정과 거의 정확히 겹친다. 전화망과 교환기 국산화, 디지털 이동통신과 광대역 인터넷, 모바일 멀티미디어와 5G, 그리고 6G·AI·공공서비스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ETRI는 언제나 국가적 전환기에 필요한 핵심기술을 조기에 제시하고, 이를 표준화·산업화·실증으로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 의미는 개별 세계 최초 성과의 나열보다, 기술·제도·산업·공공가치를 한꺼번에 묶어 내는 연구개발 모델을 축적했다는 점에 있다.

향후 10년의 과제는 6G와 AI가 결합하는 환경에서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추격자”가 아닌 “규칙 설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 체계를 고도화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원천기술 선도와 함께 표준특허, 시험·검증, 오픈 생태계, 책임 있는 AI, 공공 실증, 중소기업 참여형 공급망 전략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지난 50년간 ETRI가 축적한 시스템 통합 능력과 공공성 기반의 R&D 경험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ETRI 50년사는 개별 기술사의 집합을 넘어 조직 구조, 연구인력, 지역 혁신, 국제협력 네트워크, 제도 변화가 서로 맞물리며 어떻게 장기적 기술경쟁력을 형성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ETRI의 성과는 특정 시기의 몇몇 상징적 성공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 문제를 연구 과제로 번역하고 이를 표준화·사업화·실증으로 연결하는 누적적 연구개발 체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ETRI 50년사를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의 국가 전략기술 연구개발을 설계하는 기준으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ETRI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패턴은 국가적 병목을 조기에 정의하고, 이를 해결하는 핵심 기술·표준·시험환경을 동시에 설계했다는 점이다. 전화망 디지털화와 TDX, CDMA, DRAM, 광대역 인터넷, 디지털방송, 5G, 그리고 AI·6G 준비에 이르기까지 연구의 단위는 개별 제품이나 단일 알고리즘이 아니라 체계 전환 그 자체였다. 이러한 체계 전환형 연구는 단기 성능 경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으며, 인력양성·산업 파급·공공 인프라 구축까지 함께 보아야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난다.

또한 지난 50년의 경험은 국가 연구소의 역할이 시장 실패를 보완하는 수준을 넘어,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시장과 제도를 앞당겨 설계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민간이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대형 실증, 국제표준 선점, 장주기 원천기술 축적, 공공서비스 적용은 앞으로도 공공 연구기관의 고유한 책무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ETRI의 다음 단계는 선도 기술의 개발 자체뿐 아니라, 그 기술이 산업과 사회에 흡수되는 경로를 더 정교하게 설계하는 방향에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ETRI 50년사는 과거의 성과 목록이라기보다 미래 50년을 준비하기 위한 운영 원리의 데이터베이스에 가깝다. 연구 주제의 선정, 조직 간 융합, 국제협력 구조, 중소기업 연계, 개방형 생태계 조성, 공공수요 발굴이 어떤 조합일 때 지속 가능한 혁신이 가능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ETRI가 축적해 온 학문적 성과와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전자·정보통신 분야의 혁신을 선도하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지속적으로 기여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 ETRI, 『ETRI 50년사 도전의 반세기: ICT 강국을 넘어 혁신의 미래로』(초안),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