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키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다
호전에이블 문종태 대표
Vol.256 October
“사업을 하면 얼굴이 변해요. 안 좋게요.”
촬영 중 던진 문종태 대표의 농담은 웃음을 자아냈지만,
그 속엔 지난 시간의 치열함이 묻어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결코 무겁지 않았다.
담담하면서도 유쾌했다.
연구자에서 호전에이블의 창업자로, 13년의 세월을 걸어오며
호전에이블은 반도체 접합소재 시장에서 혁신을 지속하고 있다.
호전에이블을 통해 만든 반도체 접합 소재는
본인의 가장 큰 성취라 언급한 문종태 대표.
그의 이야기를 더 깊이 들어본다.
반갑습니다. 호전에이블 대표 문종태입니다. 호전에이블은 일상에서 편하게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전자 제품과 성능 구현에 필수적인 반도체 칩을 접합하는 소재를 개발, 생산하고 있습니다. 시장에 진입한 소재 핵심 기술은 ETRI 구성원이 창출한 독창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호전에이블이란 명칭은 한글로 쓰지만, 의미는 한자와 영어 단어를 혼용합니다. ‘맑을 호(淏)’에 ‘새길 전(鐫)’ 그리고 ‘할 수 있다’를 의미하는 ‘able’을 합성한 명칭입니다.
사명 중 ‘맑을 호(淏)’는 연구 결과물 확보에 필요한 자금을 맑고 순수한 국민 세금을 사용했다는 의미를 지녀요. ‘새길 전(鐫)’은 개발한 기술을 고객이 사용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고요. 기술을 상용화하고 제품으로 만들기까지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데요, 지금은 국내와 해외 고객들에게 우리 상품을 공급하고 있어서 사명에 반영했던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사회구조적인 이유도 있었는데요. 연구원에 있었을 때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셨어요. 집에서 간호를 했는데 사람을 못알아보시더라고요. 그때를 계기로 삶이란 무엇인지, 앞으로의 미래는 어떻게 꾸려갈지 고민하다가 ‘변화가 필요하다’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더불어 외부 과제를 수주해 오는 시스템의 주관기관이 정부에서 기업체로 변경되는 시점이 있었는데요. 소화해야 할 과제 개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죠. 이런 상황이 너무 소모적이라 회의감도 들었어요. 이 와중에 7년 동안 연구한 전극소재를 기술이전 했는데 사업화로 이어지지 못해서 사장될 상황을 마주하게 됐고요. 큰 자본을 들여서 사회에 기여할 기술을 개발했음에도 상업화가 되지 않으니 마음이 어렵더라고요. 사업화가 왜 안 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직접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죠.
ETRI에 있을 당시에 반도체 패키지를 연구했어요. ETRI에서 연구자로 있으면서 미래 반도체 패키지 기술 개발 경향과 필요한 소재에 대한 요구 사항을 예측할 수 있는 전문성을 쌓을 수 있었죠. 그 덕분에 10년 전부터 미리 앞서 준비하고 소재를 개발할 수 있었어요.
새로운 소재를 시장에 내놓기 위해선 여러 장점이 있어야 하는데요, 가격이 저렴하다거나, 신뢰성이 높아야 하죠. 저희는 고객사의 공정 유형을 맞추고, 신뢰성을 제공할 수 있는 신소재를 선보였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기존 반도체 공정 중 디플럭스(Deflux) 공정이 필요 없는 에폭시 기반의 반도체 접합 소재(EFP/ESP 소재)를 개발해 선보였어요. 이 소재는 반도체 칩 위에 올라가는 부품들을 부착할 때 쓰는 접착소재죠. 기존에 사용하던 접합소재들은 남아있는 잔류 플럭스들을 세척하는 디플럭스 공정이 반드시 필요했어요. 별도로 에폭시를 도포하는 공정도 필요했죠. 하지만 ESP 소재는 이 공정들이 필요 없어요. 그래서 공정 과정에서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게 돕죠.
반도체 소재가 점점 고도화되면서 피치가 좁아지니 잔류 플럭스를 제거하는 과정이 점점 중요해졌는데, 우리 기술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거예요. 그 결과 현재는 해외를 비롯한 국내 글로벌 고객사와 공동 개발을 할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어요.
국내 반도체 메모리 회사와 차세대 HBM1) 모듈 적층에 사용하는 맞춤형 접합 소재 공동 개발을 하고 있어요. HBM 모듈이 촘촘하게 쌓아 올려지다 보니 그사이를 세척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이었거든요. 하지만 저희가 가진 기술은 무세척으로도 모듈을 제작할 수 있어서 2년째 공동 개발을 진행하고 있어요. 2026년도 상반기쯤 Al 시장 진입을 예상해요.
1) HBM(High Bandwidth Memory): 초고속·초고대역폭 메모리. GPU, AI 서버, 고성능 반도체(예: 엔비디아, AMD 칩)에 들어가는 최신 메모리로 DRAM 칩 여러 개를 위로 쌓아(적층) 하나의 패키지처럼 만든 구조를 보인다.
2015년도에 일본 동경 넵콘(NEPCON)2)에서 ESP 소재를 홍보했었어요. ‘세계 최초 양산’이라는 홍보 문구를 써서 걸어놨죠. 일본은 소재 강국이에요. 정말 잘 만들죠. 하지만 ESP 소재는 여러 곳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긴 했지만, 저희처럼 시제품으로 양산을 한 회사는 없는 상황이었어요. 저희가 최초인 게 맞았죠. 그런데 ‘세계 최초 양산’ 문구를 본 일본의 경쟁 업체 직원들이 멀리서 저희 부스 주위를 기웃거리더라고요.
그러다가 경쟁 업체 직원들은 너희가 왜 세계 최초 양산이냐 항의를 했어요. 저희는 이미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고 있다고 설명했죠. 한 일본인 교수는 비즈니스를 더 성공시키고 싶다면 일본 학회에 연구 결과물을 발표하라던가, 특허를 내라는 등의 조언을 주셨고요. 기술적 자문을 구했던 일본 회사도 있었어요. 소재를 잘 만든다는 일본에서 소재 기술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참 기분 좋았어요. 성취감도 컸고요.
2) 넵콘 재팬(NEPCON Japan):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기·전자 제품 설계 및 R&D, 제조 기술 전시회이다.
지금은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연구원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본인에게 주어진 연구만 집중하면서 일을 할 수 있어요. 외부 손님을 마주할 일도 별로 없죠. 이런 환경에서 체화된 습관이 창업 후 넓은 사회에서는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어요. 저는 ETRI에서 팀장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외부 사람들을 상당히 만나봤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어요. 외부 사람 만나서 나쁜 소리도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도 쉽지 않더라고요. 비즈니스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ETRI는 수평적인 조직이에요. 연구자들의 직급도 연구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변경되죠. 하지만 사회조직은 수직적인 게 남아있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회사를 운영하면서 직원들과 맞춰 나가는 게 어려움이 있었죠. 수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결국 기업은 자금이 생명이잖아요. 안정적인 운영 자금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에요.
즐거운 순간은 매일매일 새로운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거예요. 어려움을 마주할 때마다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어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면 저만의 서사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럼,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누며 도움을 줄 수도 있고요. 그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껴요.
먼저 창업 이유에 대해 확신이 부족해도 누구에게나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상대방이 공감할 수 있도록 창업 의지를 피력할 수 있어야 하죠. 부족한 확신은 창업 후 만나는 다양한 어려움을 넘어서면서 분명한 확신으로 변하게 될 거예요.
창업하면 상품을 사는 구매자에서 누군가에 상품을 팔아야 하는 판매자 입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좋은 상품을 구매하는 것도 힘들지만, 기술을 가지고 제품, 상품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은 더 힘들겠죠. 특히 경쟁자 또는 대체재가 있는 경우에는요.
그래도, 연구원 기술 중심 창업이기에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잠재력을 상품으로 빠르게 전환했으면 좋겠어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명언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을 차용해서, ‘상품이 기술에 앞선다’라는 마음으로 창업하면 좋을 것 같아요.
회사 운영 관련해서도 조언을 드리고 싶어요. 대표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 ‘입장 차이’를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부부간에도 입장 차이가 있죠. 회사도 마찬가지예요. 동일한 시공간에서 동일한 업무를 진행해도 각자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래야 다음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지난 5년간 소재 평가를 거쳐 올 7월부터 S사 스마트폰에 소재 공급을 시작했어요. 내년부터 본격적인 성장을 예상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한 걸음씩 모든 사람과 Come Together 하는 회사로 성장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