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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vol.30 201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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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으로 수놓은 만추(晩秋)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안개 낀 나루, 무진(霧津)의 실제 배경은 전남 순천.
순천에 안개만큼 많은 것이 바로, 가을 감성의 정석 ‘갈대’다.
세계 5대 연안 습지인 순천만은 우리나라 최대의 갈대군락지로 유명하다.
가을 타기 좋은 곳, 순천만에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지구의 정원을 체험하고 왔다.

순천은 하늘의 순리를 따르라고 말한다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순천만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가 에워싼
항아리 모양으로 자연 해안선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청정 생태 지역이다.
순천만의 생태적 가치를 발견하고 보존하고자 했던 지역민들의 노력을 통해
2006년에 국제습지보호협약인 람사르 습지로 등록, 2008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 41호로 지정됐다.
순천만은 5.4㎢(160만평)의 갈대 군락지과 22.6k㎢(690만평)의 갯벌로 이뤄져있고,
아름다운 경관과 풍부한 생물 다양성까지 갖추고 있는 생명의 땅이다.
봄, 가을에는 수많은 도요새와 물떼새들이 이곳을 시베리아-호주간 이동 경로의 중간기착지로 이용하고,
겨울이면 흑두루미, 재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 검은머리물떼새 등
국제적으로 보호되고 있는 철새 희귀종들이 여기에 보금자리를 튼다.
또한 갯벌에는 농게, 칠게, 방게, 짱뚱어, 꼬막, 낙지 등과 같은 저서생물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다.

가을 공기가 청량한 날,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에 들어서서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따라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걸었다.
하천 위의 무진교를 건너 다리 끝에 다다랐을 때, 바람결을 따라 너울거리는 황금 융단이 펼쳐졌다.
바람이 쓸어 넘기는 대로 일렁이는 갈대 물결은 올해 본 가장 시적인 풍경이었다.

갈대는 마음껏 흔들려도 좋다고 말한다

찬바람이 불어올 때 순천만의 멋스러움을 절정에 달하게 만드는 갈대는 습기가 많은 물가나 습지에 서식하는데, 키가 약 3m가 될 정도로 높게 자란다.
갈대에 꽃이 맺히는 시기는 이른 가을이지만 갈대꽃의 수술에 하얀 솜털이 달리는 정점은 지금 딱 이맘때, 10월 중순 이후부터다.
갈대의 뿌리는 최대 2미터로 이 뿌리가 갯벌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불순물을 빨아들이는 정화조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곳 갈대들 역시 적조를 막는 정화 기능이 뛰어나서 순천만의 천연 하수 종말 처리장으로서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는데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홍수 조절 기능까지도 해주고 있다.
풍성한 갈대 아래로 바닷물을 머금고 있는 갯벌 또한 해양 생태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왕성한 생태의 보고로서 다양한 동식물들이 살고 있다.
손바닥을 쫙 펴 갈대의 은빛 솜털들을 쓸면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프랑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의 말을 떠올렸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모습이 인간의 유약함과 닮았고, 아무리 바람이 거세도 꺾이지 않는 모습이 인간의 강인함과 닮았다는 생각에 잠긴 채
한 점의 풍경화 같은 갈대밭을 지나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섰다.

만추는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숲길을 따라 30여분을 걸어서 용산 전망대에 올랐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순천만을 대표하는 경관 중 하나로, 국내 사진작가들이 선정한 10대 낙조 명소에도 꼽힌다.
숨을 고르고 내려다 봤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생명의 땅 순천만/천학의 도시 순천’이라는 글이 새겨진 황금벌판.
그 옆으로 S자 수로가 유유히 흐르는 고즈넉한 풍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줬다.
마침 흑두루미들이 수면 위로 낮게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순천만은 천연기념물 제228호인 이 흑두루미를 비롯하여
검은머리갈매기, 황새, 저어새 노란부리백로 등 국제적 희귀조류 25종과 한국조류 220여종의 월동 및
서식지로서 전 세계 습지 가운데서도 희귀종 조류가 많은 지역이라고 한다.

경이로운 장관을 눈과 마음에 담고 있는 사이, 어느새 하늘과 강, 들녘은 노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가을의 순천’에서 자연의 참된 기운을 수혈 받고 힘차게 산을 내려왔다.

찰나의 가을이지만 그 중에서도 늦가을만의 매력은 시간이 만들어낸 마법, 농익은 멋이다.
늦가을은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이 맞으면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하다.
시간이 좀 더 걸리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그렇다.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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