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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vol.30 201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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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향 가득한 산사

매서운 추위를 뚫고 매화가 꽃봉오리를 터트렸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선비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꽃답게 매화의 꽃말은 지조, 고결함이다.
사군자(四君子) 중에 으뜸이자, 소나무·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 중 하나인 매화나무.
매화가 선비의 상징이라 불리는 이유다.

특히 통도사의 홍매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꽃을 피워
머지않아 봄이 찾아올 것임을 세상에 알려준다.
비가 내려 한층 운치를 더한 고즈넉한 사찰 통도사를 찾았다.

곱게 나이든 천년 고찰

경남 동남부에 위치한 양산에는 영축산, 천성산, 천태산 등 3대 명산이 있는데,
이 중 영축산 줄기에 수려한 위엄을 자랑하는 통도사가 자리하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646년) 자장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통도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로
법보사찰인 해인사(경남 합천), 승보사찰인 송광사(전남 순천)와 함께 국내 삼보사찰 중 하나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금란가사와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데
금란가사는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 당시 문수보살의 화신으로부터 전해받아
통도사에 봉헌한 것으로 전해지는 유품을, 진신사리는 부처님의 유골을 뜻한다.
통도사라는 이름은 ‘양산 영축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통도사 입구에서부터 고고한 자태의 굽이진 소나무들이 하늘을 뒤덮어
마치 속세와 선계를 잇는 푸른 터널을 연상케 하는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는
문자 그대로 겹겹이 우거진 솔밭길에 바람은 춤추고 소나무는 차갑기만 하다.

겨울과 봄 사이 : 홍매화

무풍한송로를 지나 흥선대원군이 쓴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 앞에 들어섰다.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정갈하게 씻고 진리의 세계를 향한다는 일주문을 지나면 사대천왕을 만나게 된다.
칼을 쥐고있는 동방 지국천왕, 탑을 들고있는 서방 광목천왕과
용을 잡고있는 남방 증장천왕, 비파를 켜는 북방 다문천왕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사대천왕문을 지나 오색찬란한 연등길을 걸으면 천왕문과 극락대전이다.
신라의 왕들은 신라의 땅을 궁극의 불국토(佛國土)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통도사 극락대전 벽화인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에서 당시 조상들의 꿈을 엿볼 수 있으며,
맑고 푸른빛의 바다가 그려진 이 벽화는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반야용선은 험난한 바다를 건너 극락정토로 갈 때 타는 배를 말하는데
앞의 용머리에는 인로왕보살이 합장을 하고 뱃길을 인도하고,
뒤의 용꼬리에는 지장보살이 배에 탄 중생들을 보살핀다.
이승에서 생을 마감한 중생들은 편안한 깨달음의 세계 극락정토를 바라보며 합장을 하고 있는데,
유독 한 사람만이 이승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건너온 저편 이승을 향해 뒤돌아보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벽화가 흙벽에 천연염료로 그려져서 흙 한 톨이 떨어질 때마다 그림의 한 조각도 함께 지워진다는 것이다.

홍매화의 고유 명칭은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의 법명에서 따온 ‘자장매(慈臧梅)’다.
홍매화의 꽃잎이 비에 젖어 촉촉하게 물을 머금은 모습이 한 점의 수채화 같다.
해마다 입춘이 지나기가 무섭게, 이 풍경을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심지어 큰 이젤을 옆에 두고 자장매를 스케치하는 화가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소담스럽게 핀 홍매화 한 그루로 인해 온 마음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국보 제290호 : 대웅전 · 금강계단

현재 통도사에 남아있는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핵심인 곳이 대웅전과 금강계단이다.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이기 때문에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법당 너머에 진신사리 탑이 있다.
대웅전과 금강계단은 국보 제290호로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단층팔작지붕 목조건물이며,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금강계단은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인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장소이다.

대웅전 옆에는 통도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담겨있는 구룡지(九龍池)가 있다.
본래 통도사 절터는 9마리의 용이 사는 큰 연못이었는데 자장율사가 용들에게 '이곳에 절을 지으려 하니 떠나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용들이 꿈쩍하지 않자 자장율사는 법력으로 큰 연못을 펄펄 끓게 하였다.
이 때 다섯 마리는 남서쪽으로 도망을 가다가 떨어져 죽었고, 세 마리는 동쪽으로 달아나다가 바위에 부딪혀 죽었다.
마지막 한 마리가 '눈이 멀어 갈 수 없으니 연못에 그대로 있게 해주면 절을 지키겠다'고 간청하자
자장율사는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허락해주었고, 그것이 바로 구룡지다.

한편, 구룡지 옆에는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조상들이 섬기던 산신을 모신 전각으로
불교와는 관련이 없지만 신성한 장소인 만큼 보존하자는 뜻을 모아 사찰의 울타리 밖에 그대로 안치해오고 있다.
다른 신앙도 자비롭게 포용하고 공존하는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맹위를 떨치던 동장군의 모진 추위를 견뎌내고, 연약한 꽃망울을 야무지게 터트리는 홍매화.
퇴계 이황 선생은 매화와 관련된 시를 대략 100수나 쓸 만큼 이 꽃을 좋아하여,
그의 좌우명이 ‘매화는 한평생 추위에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였다고 한다.
세상 풍파를 묵묵히 견디고 이겨내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보란 듯이 드러내는 홍매화를 보았으니,
오늘부터 봄이라 하여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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