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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6 201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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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발자취를 찾아서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간직한 고장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순교자들의 넋을 간직한 땅, 서산시 해미면. 천주교도들이 군졸에 이끌려 넘었던 한티고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시기 체포된 내포지역 신도들은 홍주와 보령, 공주, 그리고 이곳 해미로 압송돼 처형당했다.

해미면 조산리와 읍내리 사이를 흐르는 해미천 주변은 신도들을 생매장, 익사, 교수 등의 방법으로 처형하던 형장이었다. 이 일대는 순교를 앞둔 천주교도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소리가 ‘여수머리’로 잘못 전해져 ‘여숫골’로 불려왔다.

해미천을 따라 조성된 해미성지에는 생매장 터를 형상화한 성당과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평소 순례자들만이 간간히 찾던 이곳은 교황 방문 이후 그의 발자취를 느끼기 위해 찾은 방문객들로 북적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미성지성당에서 아시아 주교단과 만남을 갖고, 해미성지기념관에서 순교자 유해를 참배했다.

해미성지기념관에는 순교 기록화와 조각이 설치돼 있고, 안쪽에는 순교터에서 수습한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기념관 뒤편에는 ‘진둠벙’ 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압송된 신도들이 너무 많아 웅덩이를 파고 산채로 묻었다고 한다. 수많은 신도들이 순교한 진둠벙은 참혹한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신랄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진둠벙 곁에 놓여있는 널찍한 돌은 ‘자리개돌’이라 부른다. 자리개는 큰 돌다리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것을 이르는 말로, 이 돌 위에서 자리개질이 행해졌다.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생매장 당한 곳 인근에는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순교탑과 순교자 무덤이 있다.

이곳 해미성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순교터로, 순교자들의 유해가 발굴되고 보존돼 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계기로 해미성지는 '상처의 땅'에서 '평화와 안식의 땅'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됐다.
왜구로부터 서해안을 지켰던 성곽

해미를 찾은 교황의 또 다른 방문지는 해미읍성이다. 낙안읍성·고창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모습을 잘 간직한 3대 읍성에 꼽히는 해미읍성은 여말 선초에 왜구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1416년 태종이 서산 도비산에서 강무(왕의 친림 하에 거행된 군사훈련)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주변지역을 둘러보게 됐는데, 당시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하여 태종 때인 1417년부터 세종 때인 1421년까지 약 4년에 걸쳐 축성하였다.

둘레 1.8km 규모의 해미읍성에는 동문·서문·남문 격인 세 개의 문루가 있으며, 초기에는 2개의 옹성과 동헌, 객사, 총안, 수상각 등을 갖춘 규모가 매우 큰 성이었으나, 현재는 조선시대 관아인 동헌과 객사만 복원되어 있다. 세 개의 문루 중 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진남문은 해미읍성 복원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성문으로,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진남문을 통과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면 동헌과 객사가 복원돼 있다.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정무를 보던 건물로 지방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또한 객사는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됐던 곳으로, 관리들은 이곳에서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왕궁을 향해 절을 올리는 망궐례를 올렸다고 한다.

한편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여러 읍성 중에서도 성곽의 형태를 가장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해발 130m의 낮은 구릉에 터를 잡고, 성벽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은 높이 4.9m, 폭 2.1m로 축조하고, 성문은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아올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따뜻한 메시지

해미읍성은 1790년대부터 100년 간 한국 천주교 박해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읍성 내부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들이 여럿 남아 있다. 읍성 중간쯤에는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가 서 있는데, 수많은 신도들이 이 나무에 매달려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신도들의 처형장이었던 지성루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비오)가 순교한 옥터 등이 남아있다.

이렇듯 해미읍성은 순교의 피가 뿌려진 성지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에서 아시아청년대회의 폐막미사를 집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황은 폐막미사를 통해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면 진정한 대화는 없다"면서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이 모든 대화의 출발점"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어렵고 힘든 사회에서도 용기를 갖고, 기쁘게 살아가라"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한 이후 해미에는 그의 발자취를 되새기려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교황에게 주어진 권위를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찾아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는 곳마다 소외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어루만지고, 감싸안아주는 등 종교를 초월하여 우리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선물했다.

비록 그는 우리나라를 떠났지만, 교황이 남긴 감동은 아직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해미에서 교황이 남기고 간 따뜻한 메시지가 수많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해주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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