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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6 201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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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 타고 추억을 찾아
낭만 가득한 유람선

춘천 시내를 빠져나와 꼬불꼬불 이어진 산길을 15분쯤 달려 소양호에 도착했다. 호반의 도시답게 넓게 펼쳐진 소양호의 모습에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다. ‘내륙의 바다’라고도 불리는 소양호는 그 별칭에 걸맞게 모습이 무척이나 장쾌했다. 소양호에 가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유람선 관광인데, 소양호 선착장에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람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청평사로 가기 위해 유람선에 올랐다. 호수의 물살에 따라 유람선은 흔들흔들 움직이고, 유람선의 옛 추억들도 함께 넘실넘실 거리는 것만 같다. 곧 출발한다는 선장의 말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기대에 찬 모습이었다. 유람선 위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고, 호수와 함께 이어지는 기암절벽은 병풍처럼 길게 펼쳐져 있었다. 유람선이 물보라를 일으키는 소리를 음악 삼아,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선장은 ‘청평사에 도착했다’고 알린다.

1967년 소양댐이 완공되면서 운항되기 시작했다는 유람선은 70-80년대 청춘을 보낸 50-60의 세대들에게 낭만을 전해주는 요소이다. 그 시기에 유람선은 청평사까지 하루 12번을 운행했는데, 배표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한다. 표도 구하기 힘든데, 어쩌다가 막배도 놓쳐버리면 발이 묶여 발만 동동 구르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오봉산 동쪽 백치고개에 군사도로가 확장되면서 ‘막배의 추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그 낭만만큼은 살아있는 듯 보였다.
설화따라 가는 길

유람선에서 내려 청평사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정도 걸린다. 울창한 푸르름이 완연한 여름, 신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자연 그대로의 숲을 걷다보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곳곳에 솟은 나무와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이 걷는 내내 사람들을 반겼다. 길옆 너럭바위 위로는 물들이 미끄러지듯 흐르고, 사람들은 물 속으로 들어가 여름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청평사로 오르는 길에는 볼거리, 얘깃거리도 참 많다.

청평사로 가는 구간 구간마다 친절한 안내판이 얘깃거리를 전달해 준다. 먼저 일행을 반긴 건 ‘공주설화’가 전해진다는 동상이다. 한 여인이 바위 위에 앉아있는데 오른손엔 무언가가 놓여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뱀이다. 그리고 여인은 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상사뱀의 설화를 형상화한 것으로 그 사연은 이렇다.
당나라 태종의 딸 평양공주를 짝사랑한 무사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이루지 못할 사랑을 꿈꾸다 상사병으로 죽은 뒤 뱀으로 환생한다. 환생한 그 뱀은 공주가 잠든 방으로 기어들어가 그녀의 몸을 칭칭 감고 풀어주지 않았다. 그 후 공주는 뱀을 떼어내기 위해 여러 치료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리고 궁궐을 나와 방랑을 하다 이곳, 청평사까지 오게 된다. 이곳에서 공주는 절에 혼자 들어가겠다고 뱀에게 간청해 뱀은 공주를 잠시 풀어줬다. 홀로 청평사에 들어간 공주는 기도를 올렸는데, 마침내 기도가 통했던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뱀은 벼락을 맞아서 죽고 공주는 그제야 자유의 몸이 됐다.
전설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청평사로 향해서 오르막을 지나면 두 개의 폭포가 나온다. 앞에 있는 것이 ‘쌍폭’, 뒤에 있는 것이 ‘구성폭포’이다. 옛 문헌에는 이 두 개의 폭포를 일컬어 ‘형제폭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앞뒤로 나란히 자리잡은 것이 사이좋은 형제처럼 다정해 보였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쌍폭을 바라보니 물줄기는 세차게 떨어지고 폭포 아래 고여 있는 푸른 물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그리고 아홉 가지 소리가 난다는 구성폭포(九聲瀑布)에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 아홉 가지의 소리가 날까?” 생각하며 폭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구분이 될 듯 말 듯 귓가에는 폭포의 소리가 울렸다. ‘세-세‘ 떨어지는 소리가 아쟁의 소리처럼 맑고 깨끗할 뿐 아홉가지의 소리는 가늠할 수 없었다.
‘마음의 문’ 회전문을 지나 청평사로

고려 광종(973년) 때 영현선사가 처음 세웠다고 알려진 이 절은 한동안 폐사되었다가 이후 선종(1089년) 때 다시 세워졌다. 그때 절을 다시 세운 것은 관직을 버리고 이곳으로 와 은거한 이자현이다. 그는 절의 이름을 ‘문수원’이라 짓고 선(禪)을 즐겼는데 이때부터 주변 호랑이가 사라져 평화롭게 되었다 해서 ‘청평사(淸平寺)’라 다시 이름 지었다.

수려한 오봉산 산자락에 둘러싸인 청평사를 마주하니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마치 절을 먼저 앉혀 놓고 산을 옮겨놓은 듯 조화가 절묘했다. 청평사로 들어가기 전, ‘장수샘’에서 마른 목을 축였다. 오르는 길이 그리 가파르진 않았지만 이쯤 올라오면 누구나 목이 마르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곳에 장수샘을 놓아둔 듯 보였다. 극락전을 비롯한 청평사의 문화재는 6·25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중에서 다행스럽게도 보물로 지정된 회전문(廻轉門)만이 이 절을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회전문이라고 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문을 연상했었지만, 그저 뻥 뚫린 통로 같은 모습이다. 회전문의 이름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로, 이 문을 들어서는 중생들에게 윤회의 전생을 깨우치기 위한 ‘마음의 문’인 것이다.

청평사는 여느 사찰과 다른 특이한 것들이 많다. 우선 절을 굳건히 지켜야 할 사천왕이 없고, 중문(中門)인 회전문의 천장에는 향교나 서원에 있는 홍살문이 있다. 그리고 회전문을 들어서면 지붕이 있는 긴 복도인 회랑이 이어져 있어 마치 궁궐을 들어서는 듯한 풍경을 연상시킨다. 또한 경내에는 탑이 없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돌을 깔아 놓았고 이것들은 모두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양식들로서 청평사가 고려시대 왕들의 사랑과 국가적 관심을 받은 큰 절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 속에 자리한 청평사 내부를 거닐고 있자니 언제나 마음 가득 자리잡은 욕심이 한 풀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청평사의 운치, 절까지 오르는 길목, 계곡의 호젓함도 모두 다 좋았지만 무엇보다 ‘유람선’을 타고 간다는 것만으로도 들뜨게 만들었던 청평사 길이었다. 경내를 둘러보며 지나온 시간들을 찬찬히 돌아본다. 일상의 고단함도, 과욕도, 잠시 내려놓고 참된 ‘나’를 만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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