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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79 · February 24 · 2017 · Korean

Focus  ______  전서현 인간로봇상호작용연구실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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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게 꼭 필요한 따뜻한 기술 만들고파

매대에 수많은 캔 음료수가 있다. A는 자신이 마시고 싶은 특정 음료를 고른다. 반면 B는 그저 음료라는 정보만 알고 집는다. 여기서 A는 비시각장애인, B는 시각장애인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음료’라고만 된 점자 표기에 의지해 열어보기까지 그것이 콜라인지 사이다인지 모른 채 구매한다. 기술의 음영 지대에 있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를 도와 과학기술 민주화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마음 따뜻한 전서현 선임연구원을 만나본다.

우월함이 아니라 우아함을 위하여

1% 앞서는 우월한 기술을 만드는 노력이 세상에 희망을 심는 1%의 노력으로 재탄생하기까지 어떠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 있을까. 전서현 선임은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소개했다. 봉사활동을 찾아다닐 정도로 이타심이 뛰어난 편도 아니었고, 그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사는 일반 시민이자, 자동으로 움직이는 로봇에 애정을 가진 전자공학도였다. 그녀 또한 일반 연구원들과 다를 바 없이 세계 최고의 기술, 연구 성과에 집중했다.
그러다 작년에 서울디자인포럼에 참석하면서부터, 그녀의 기술적 가치관은 커다란 변화를 맞았다. 인간로봇상호작용연구실에서 근무하는 그녀는 로봇의 자율주행 기술 개발 분야에서 그동안 성능을 1% 올리는데 애써왔지만, 기술의 성능 차이를 논하기 전에 막상 자율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이 이러한 기술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 로봇 자율주행 기술 분야가 발달한다 해도 장애인 같이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아예 이를 이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의 음영 지대를 바라보며 그녀가 공학자로서의 소명의식을 느낀 순간이었다. 사회적 약자가 불편한 점을 개선하고자 스스로 기술을 만들기는 어렵고, 경제논리에 움직이는 기업에 이러한 역할을 맡기는 것도 한계가 있기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인 ETRI가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전자와 통신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데 모인 곳이고, IT는 다른 기초과학이나 산업기술에 비해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분야가 넓다.
ETRI 연구원인 자신 역시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자각할 무렵, 원내에 ‘사회적 약자를 위한 융합 ICT’ AOC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모임에 뛰어들었다.

촉각으로 느끼는 세상

전 선임은 시각장애인들이 눈앞의 입체 모양을 손으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Haptic Depth Device’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햅틱 기술은 컴퓨터의 기능 가운데 촉각과 힘, 운동감 등을 느끼게 하는 기술이다. 그녀는 이를 이용해 시각장애인들이 길거리를 다니면서 턱이나 함몰지형, 장애물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머리에 레이저 거리 센서를 달고 3차원 햅틱 장치로 지형을 표현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AOC의 이지수 연구원이 연결해준 실제 시각장애인과의 면담을 통해 실제 수요가 다르다는 것을 경험했다. 시각장애인들은 보통 지팡이로 웬만큼 앞의 장애물을 파악 가능하기에, 거추장스럽거나 더 무거워지는 장치를 원하지 않는다.
전 선임은 잠시 주춤했지만, 아이디어의 방향을 바꿨다. 바로 책에 이 기술을 적용해보자는 것. 시각장애인용 점자 도서는 텍스트에 따라 점자가 올라와 글을 파악할 수 있는데, 도표와 그림은 점자로 표현하지 못하기에 내용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를 위해 손에서의 촉각으로 삼각뿔, 원기둥 같은 인포그래픽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햅틱 장치를 개발하고자 한다.
AOC의 최대 장점은 휴먼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니더라도 기술을 지닌 전문가를 소개 받을 수 있다. 전 선임 역시 햅틱 분야의 전공자는 아니지만, 원내에 햅틱 전공자를 소개받았다. 앞으로 자문을 얻어 그녀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기술로 현실화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융합 ICT AOC

7월 19일 첫모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약 9번의 모임을 가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융합 ICT’ AOC에는 14명이 활동 중이다. 정기적으로 나오는 6명의 고정 멤버를 제외하고 유동적으로 인원이 오고 간다. 적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열정으로 뭉친 이들이기 때문인지 유익한 정보를 수시로 주고 받는다. 그래서 그녀는 본 AOC 활동으로 얻은 장점으로 ‘시야를 넓힐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매회 각자 사회적 약자를 위해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온 것을 발표하고 토론하며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다. 다른 회원들의 아이디어를 듣고 있노라면 생각해 보지 못한 점을 배울 수 있다.
가령 캔 뚜껑에 표시된 점자가 ‘음료’라고만 돼있다는 문제점을 알린 S모 연구원은 이에 핸드폰으로 바코드를 읽어서 해당제품이 무엇인지를 소리로 알리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그동안 시각장애인들이 이런 간단한 것도 보지 못함을 몰랐다는 생각에 그녀는 놀랐다. 이런 간단한 기술도 해결이 안 됐는데, 자신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을 만든다고 시간을 보내왔던가,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한편 이지수 연구원은 시각장애인과의 풍부한 인맥을 바탕으로 그들이 생활에서 불편해 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시각장애인 학생이 발표 수업을 할 때 음성으로 페이지 번호를 알려주고 넘길 수 있는 핸드폰 인터페이스를 고안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대단한 기술이 아니라 이렇게 작은 것이라는 것을 전 선임은 새삼 깨달았다.
O모 연구원은 SK에서 내놓은 LoRa와 같은 저전력 광대역 통신 기술을 이용하여 반려견이나 미아, 치매노인 등에게 간단한 팔찌를 채워주면 배터리 교환 없이 약 6개월간 위치정보가 송신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하였다. 전 선임 또한 두 아이의 엄마이기에 항상 붐비는 곳을 가면 아이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부모에게 유익한 제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밖에도 자료조사로 얻는 정보 또한 소중하다. 미국의 웹사이트 ‘abledata.com’은 다양한 맞춤형 장애인보조기구가 많이 올라와있다. 여기에 사용자들이 제품에 피드백을 줌으로써 더 나은 제품을 만들도록 정보를 제공한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장치는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을 느꼈고, 우리나라에 맞춤형 장애인보조기구 수요와 제작자를 연결해주는 부분이 많이 미흡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장애인의 개성을 중요시 하는 인권과 기술의 선진 사례를 통해 우리나라의 부족한 부분을 볼 수 있었다. 모임을 거듭할수록 우리 사회에서도 기술수요가 쏟아지는 것을 느꼈고, 현재의 기술수준으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하지만 단지 제품화되지 않아서 활용되지 못 하는 기술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 모임으로 배운 정보를 마음에 새기며 자신의 기술 아이디어를 구축 중이다.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위하여

그녀는 미래에 과제 책임자가 된다면, ‘현장의 수요를 반영해, 현장에 적용 가능한 기술’을 만들 수 있도록 토대를 닦고 싶다고 말한다. “풀어야 할 기술 과제를 실제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찾고, 직접 자료를 수집하여 문제점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명확하게 표시, 기록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 보고서를 기반으로 정부기관과 협의해서 필요성을 강조하여 예산을 받아오고, 마지막으로 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연구원들에게는 무엇보다 기술을 현장에 적용 가능한 상태로 만들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문제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예산을 받아오는 사람은 쉽고 명확하게 설득하고,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현장 테스트를 통해 확실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그녀에게서 현장 중심과 협업을 우선시하는 마인드를 엿볼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원내에 경쟁 문화가 아니라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모두가 자기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경쟁의 피로를 풀고 서로 협업해 함께 움직이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다.
ETRI의 위기라는 말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이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물론 세상의 기술 패러다임을 바꾸고 ETRI 대표 기술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연구원이 있어야 한다. 다만 세상의 빈틈을 메워주는 기술을 개발하는 역할 역시, 국가기관 연구원의 사명이자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리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융합 ICT’ AOC와 전 선임의 노력으로, ETRI가 과학기술 민주화를 선도하는 대표 기관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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