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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vol.30 2015.01.09
스페이스
맥주가 품격을 만든다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말해보겠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식가로 불리는 브리야 사바랭은 미식에 관한 저서를 펴내며 이렇게 말했다.
취향이 라이프 스타일이 되고, 나아가 매력 자본이 되는 시대다.
브리야 사바랭의 말처럼 ‘식(食)’은, 자신의 안목과 품위를 드러내는 현대인의 표현법이 되었다.

최근 이런 문화가 맥주 시장에도 나타나고 있다.
라거 일색이던 맥주 세상에 다양성과 희소성으로 무장한 크래프트 맥주 열풍이 불고 있다.
크래프트 맥주는 소규모 맥주 양조장에서 독자적인 레시피로 만들어낸 수제 맥주를 뜻하는데,
물 맑고, 공기 좋은 충북 음성에 맥주 애호가들의 집합소가 있다고 하여 찾아가봤다.

골드 클래스, 리얼 맥주

태초부터 인간에게 사랑받아온, 인류 최초의 알콜 음료 ‘맥주’.
알고 보면 맥주는 완벽한 자연식품이다. 맥주에는 방부제, 색소, 향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오로지 보리, 홉, 효모, 물로만 만들어지는, 자연에 가장 가까운 음료라고 할 수 있다.
그 유래는 1516년,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 맥아(보리), 홉 ,물, 효모 이외의 원료 사용을 금지하는 ‘맥주순수령’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이렇게 유구한 전통을 가진 맥주 중에서도 맥주 애호가들이 진짜 맥주라고 평하는 맥주가 바로 크래프트 비어다.
맥주는 네 가지 기본 재료를 어떤 비율로 조합하고, 어떤 향신료를 첨가 하는가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
그래서 만드는 사람 특유의 제조법으로 세상에서 하나 뿐인 맥주 맛을 창작해낼 수 있고, 이것이 바로 크래프트 비어의 매력이다.

크래프트 비어라는 단어는 1980년대 초 미국양조협회(American Brewers Association,이하 ABA)에서 만든 명칭이다.
ABA에서 정의한 크래프트 비어의 조건은 소규모(Small), 독립적(Independent), 전통적(Traditional) 이 세 가지다.
구체적으로 '연간 생산량이 600만 배럴 이하일 것, 독립 자본으로 경영함이 원칙이며 외부 자본 비율은 25% 미만일 것,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장의 주력제품이 올몰트 비어(맥주 원료인 발효 보리만 100% 사용해 만든 맥주)이거나,
올몰트비어 또는 첨가물이 들어간 맥주의 비중이 최소 50%는 되어 저마다의 전통성을 갖출 것'
이런 요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궁극의 신선함 한 잔

충북 음성의 음료 및 주류 공장들 사이에 고풍스러우면서 감각적인 외관 하나가 눈에 띈다.
작년, 주세법이 개정되어 국내에서도 소규모 양조장 운영이 가능해지면서 설립된
한국 최초의 마이크로 브루어리 ‘코리아 크래프트 브류어리’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높은 천장의 샹들리에 조명이 로비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로비의 샹들리에는 맥주 거품을 형상화하였고, 전구의 갯수는 97개다.
이 곳 주소가 원남산단로 97번지라는 이유에서다. 조명 하나 하나에도 스토리텔링을 담은 공간.
이런 디테일이 품격을 좌우한다는 걸 잘 아는 것이다.
방문자 모두에게 제공되는 브루어리 웰컴 카드를 받고, 본격적으로 브루어리를 둘러봤다.

로비에서 위생커버를 신고, 공장안으로 들어갔다.
맥주의 제조과정은 ‘발아–분쇄–담금–여과–끓임–냉각– 발효–병입’인데, 크게 세 가지 공정으로 나뉜다고 한다.
첫 번째 단계인 맥아를 빻는 일이 진행되는 제분실로 향했다.
오렌지, 감귤 껍질, 맥아, 코리앤더, 녹색 알갱이 홉, 잘 말려진 재료들을 미세한 가루로 분쇄하는 곳이다.
이렇게 분쇄된 맥아는 담금, 여과, 끓임 과정을 거치고, 두 번째 공정인 담금 과정에 들어간다.
양조실로 이동하자 브루어(맥주를 만드는 사람)가 분말상태로 넘어온 부재료를 섞어 물에 담가 끓인 다음 냉각시키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끓인 맥아즙은 마지막 공정인 숙성에 들어간다.
숙성실로 보내진 맥아즙은 시간이 지날수록 즙 내 당분은 점점 줄어들고 알코올과 탄산이 늘어난다고 한다.
이 때 위에서 효모가 발효하면 에일(ale)계, 아래에서 발효하면 라거(lager)계로 나뉜다.

맥주의 본고장 독일에서는 ‘마을 밖 10km를 벗어나면 맥주가 아니니
맥주는 양조장 굴뚝 아래서 마셔라.'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맥주의 생명은 신선함이다.
이곳에서 만드는 맥주 맛이 일품인 이유는 신선함을 살리는 브루잉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일본 최고의 크래프트 브루어리 KIUCHI BREWERY의 20년 노하우를 고스란히 전수 받고,
몰트와 홉과 같은 원재료를 100% 유럽에서 냉장 컨테이너로 수입된 재료들만 사용한다.
수입한 직후에는 브루어리 내의 냉장창고에서 최상의 조건으로 보관한다.
또한 맥주에 첨가되는 과일과 곡물들은 청정 지역 음성에서 재배된 특산물들이다.
브루잉 과정에서 나오는 찌꺼기들은 사료로 재활용할 수 있도록 인근의 농가로 보낸다고 한다.

장인들의 창조 정신 ‘크래프트맨십’

나무로 지은 양조장 안에서 나이 든 장인이 수작업으로 술을 만드는 풍경도 매력적이지만, 요즘 크래프트 비어 장인들은 그 이상이다.
엄격하게 품질을 관리하고, 새로운 수제 맥주를 개발하는 진취적인 브루마스터는 잊혀진 맥주 스타일을 복원하거나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다양한 크래프트 비어들을 창조하고 있다.
독창적인 장인들은 전통을 존중하되 전통에 매이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장인정신 ‘크래프트맨십’을 보여준다.

코리아 크래프트 브류어리의 브루마스터 마크 헤이먼 역시 창조정신이 뛰어난 장인이다.
이력부터 특별한 그는 엔지니어로서의 역량과 브루마스터의 재능을 겸비한 인물이다.
MIT를 졸업한 후,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했고,
URI 식품공학과와 시벨 기술대학에서 취미로 시작한 홈 브루잉 기술을 전문적으로 키웠다.
자연스럽게 그의 인생은 공학과 맥주 양조라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에 오기 전 마크 헤이먼은 미국과 일본의 쟁쟁한 양조장에서 엔지니어와 브루마스터로 일했다.
브루마스터인 그는 이곳에서 화학자와 연구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투어가 끝나고, 오픈 키친 Tap room에서 맛본 맥주 한 컵은 천상의 맛이었다.
맥주를 부르는 경쾌한 컬러감을 가진,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루이고스트 의자에 앉아
뱅앤올룹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 맥주를 들이키게 되는 오픈 키친 역시 디자인 감각이 돋보이는 공간이다.
맥주광들에게 입소문이 날만하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하루의 끝, 좋은 사람들과 마시는 좋은 술은 고달프고 팍팍한 일상으로부터 우리를 잠시 구원해준다.
더 나아가, 이제 음주는 그날의 감정을 해소하는 임시처방 뿐만 아니라 미각의 호기심과 즐거움을 충족시켜주는 여가 문화로 진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신중해 질 수 밖에 없다. “What is your b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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